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가 보다. 세밑에 돌아가는 사회양태를 보노라면 흡사 먹구름은 가득한데, 비는 오지 않는 날씨처럼 정말 우울하고 답답하다. 며칠 전 구독하고 있는 신문 1면에는 미국 전·현직 그리고 차기대통령들이 한자리에 모여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담소하는 사진이 실렸다. 피부색도 다르고 출생지도 다르며 종교도 분명 같지 않은 이 사진에서 필자는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팍스(pax)아메리카의 모습을 본다. 묘하게도 다음 날 지면에는 우리나라 국회의원끼리 뒤엉켜 싸우는 모습이 담긴 미국 시사주간지인 타임지 표지가 게재된 기사를 보면서 어쩌다 우리의 현실이 이런 모습으로 세계인들에게 비쳐지는지 정밀 안타깝다. 세계적인 금융 환란 사태를 겪으면서 유럽과 미국의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인간심리의 원초적 본능을 담은 정반대의 뜻을 지닌 고통(Schaden)과 기쁨(Freude)을 합산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어휘라고 한다. 상대방의 고통을 나누기보다는 이를 좋아하고 부추기는 현상이 우리나라 정치 1번지인 여의도 국회는 말할 것도 없고 국가의 백년초석을 다지는 신성한 교육현장인 학교에서조차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에 필자는 교직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심한 자괴감과 울분을 느낀다. 따라서 경제 ‘워룸’(war room)도 중요하지만, 우선 우리 국민들 머릿속에 잠재된 그릇된 인식과 구습을 청산하지 않으면 한국의 선진화는 요원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너무 자주 들어서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라 하지 않던가. 작금의 경제 환란은 외부요인이 크다 하지만, 어찌 보면 우리 자신의 미래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고 오로지 기존의 ‘파이’만 나누면 된다는 안이한 지난 정부의 국정과 더불어 많이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이른바 편 가르기 식 교육행위에 몰두한 이념 지향의 교육자들 책임 없지 않다고 본다. 교육이 바로서야 경제도 바로서고 나라도 건강해진다. 이제는 정말 ‘좋은 학교 만들기’ 운동을 통한 교육 제자리 찾기가 절실한 때다. 그런데 요즘 먹고사는 문제가 워낙 급해서일까? 아니면 새 정부 출범 초기에 터진 이른바 ‘광우병’이라는 악플에 의한 촛불시위에 단단히 시달린 때문일까? 인수위 시절의 당차던 교육개혁 의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정말 아리송하다. 미국 하면 뉴 프런티어 정신과 더불어 법과 원칙을 존중하는 국민성이 사회 밑바탕 흐르고 있고, 일본 하면 사무라이 기백과 대를 잇는 장인정신이 있어 오늘의 부강한 사회를 이루고 있다. 그럼 한국 하면 세계인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백의 단일민족에 정이 넘치고 끈기 있는 동방예의지국임을 떠올릴까? 그러나 이것도 이제는 철 지난 옛말이다. 혹여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촛불시위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해머’와 ‘가스통’을 들고 여·야 국회의원들의 이전투구 하는 모습을 상기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선조들의 근면 성실한 양습(良習)은 언제부터인지 소리 소문도 없이 모두 사라지고 정말 이 세상에 내놓기 부끄러운 악습(惡習)들만 남아 날이 새는지도 모르고 아웅다웅 하고 있으니 정말 후대들 보기가 부끄럽고 세계인들 보기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해 우리나라 최대 그룹 중 하나인 S그룹이 새해 버려야 할 구습을 선정하여 발표한 적이 있다. ①원칙과 규칙을 지나치게 멀리하지 않는가 ②항상 부산스럽지 않나 ③생각이 같은 사람만 좋아하지 않나 ④실천보다 문장 짓기만 좋아하지 않나 ⑤나만 청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⑥취미를 지나치게 즐기지 않는가 ⑦남을 너무 시기하지 않는가 ⑧절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등 모두 8가지다. 이 중에는 필자 자신도 반성하고 버려야 할 항목도 몇 개 눈에 띈다. 여러 친목 모임에 참석하다 보면 필자는 만날수록 정이 새록새록 두터워지는 친구나 이웃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내가 왜 이 모임에 앉아 있는지?’ 부담이 되는 모임도 없지 않다. 이렇게 상반된 느낌을 갖는 요인은 아주 사소한 데서 출발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말은 하면서도 실상은 자기 의견이나 소신과 맞지 않으면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일단은 상대방의 기를 꺾어야 속이 편한 이른바 우리 한민족의 고질적인 기질이 작동하기 때문이리라. 하긴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 근성을 지닌 우리 민족이니 더 말해 뭣 하라. 작년에 소천(所天)한 ‘토지’ 작가가 서울의 편안한 생활을 마다하고 척박한 강원도 오지에서 식물들과 대화하며 지낸 연유를 비로소 알 것만 같다. 김청규/인교연 혁신포럼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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