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잊을 수 없는 선생님 / 김임자
잊을 수 없는 선생님 / 김 임 자
벌써 60여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눈감으면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 때,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 기억이 새롭다. “얘들아, 낮잠시간이다.” 자칭 스탠다드 폼을 으쓱대며 운동화와 운동모를 챙기고 호루라기를 목에 걸며 교실을 나갈 채비를 끝내고 한 발을 탕탕 구르시며 기분 좋게 던지는 담임선생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모두 “와아!”하는 함성을 지르며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키득키득’ 킬킬거리며 발장난을 치고 놀기도 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생각이 안 나지만 책걸상 틈 사이로 소곤소곤 비밀 이야기를 나누며 주어진 자유 시간을 즐겼다. 한편에서는 정말로 낮잠을 즐기는 친구도 있었다. 물론 절대로 교실 밖으로 나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선생님은 우리학교 육상대표, 즉 계주 선수들의 바턴터치 코치였다. 정해진 시간에 지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 때나 불쑥 나가시며 우리에게 자유 시간을 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천시 종합체육대회가 열릴 무렵이 되면, 교실 앞 측면에 걸려있는 운동모를 언제 쓰실 것인가가 관심거리였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학습)에서 해방되는 것, 그것은 두 손 높이 들고 쾌재를 부를 만큼 반가운 일이다. 게다가 교실 바닥에 자유롭게 들어 누워서 뒹굴 수 있다는 것은 그 시절 이미 파격적이지 않은가. 선생님은 계주 선수들은 재빠르게 달리는 것이 기본이지만, 바턴터치를 기술적으로 깔끔하게 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라고 강조하시고, 당신이 교실까지 비우며 하시는 일의 중요성을 힘주어 말씀하시고 우리에게는 자습 보다는 휴식이 필요한 시간이라며, 그렇게 적절하게 시간을 활용하셨다. 정말 우리 선생님의 바턴터치 지도 실력은 해마다 봄, 가을에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종합체육대회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앞서 달리는 타 학교 선수들을 차례차례 따돌릴 땐 우리학교 학생들의 응원가 함성은 하늘 높은 줄을 몰랐다. “OO 선수야, 용감하도다. 무쇠 같은 팔다리…….” 네 명의 선수들이 100m씩 달리는 계주에서 첫 번째, 두 번째 선수는 뒤쳐져 달리다가 세, 네 번째로 이어지는 절묘하고 정확한 바턴터치 실력으로 조금 씩 조금 씩 아슬아슬 앞으로 추월 할 때의 짜릿짜릿한 쾌감은 소름을 돋게 하여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일사불란(一絲不亂)하던 3,3,7박수, 기차박수 응원 소리는 이미 ‘야’ 하는 함성소리로 뒤 덮여 버렸고, 리듬 맞춰 휘날리던 응원기들은 응원석을 뛰쳐나가려는 아이들을 막아내려는 가름막이 되었고, 응원을 이끌던 단원들은 질서유지에 쩔쩔매며 안간 힘을 쏟았다. 남자들 계주에 이어 여자 계주까지 결승테이프를 끊으며 우승을 차지할 때면 우리는 모두 흙먼지 범벅의 응원석을 펄쩍펄쩍 뛰어올라 얼굴과 온 몸이 온통 뿌연 먼지투성이가 되어 응원가와 교가를 번갈아 소리 높여 힘차게 부르며 오래도록 환호하며 기쁨을 만끽했다. 맞은 편 에서 우리학교 보다 두 배나 많은 응원부대를 동원하여 응원석을 가득 메우고 화려한 의장대, 고적대, 브라스밴드에 아코디언 부대, 언제 배웠는지 탭댄스까지 선을 보이며 열띤 응원을 벌이던 라이벌학교가 스위치가 꺼져버린 마이크처럼 소리 없이 멍하니 응원을 멈춰버린 모습을 확인할 때면 우리의 기세는 더 등등하여 함성을 지르고 또 지르며 온 세상이 우리들 것인 양 즐거워했다. 소리를 너무 질러 캑캑거리면서도, 뒤집어 쓴 먼지로 눈썹과 얼굴이 뽀얗게 되었는데도 우리는 서로들 얼굴을 마주보고 깔깔거리며 마냥 즐겁기만 했다. 맞은 편 학교 학생들은 늘 우리학교 학생들만 보면 똥통학교라고 빈정거리며 놀려대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화려함과 웅장함에 주눅이 들어 있어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면서도 마음 속 한편에는 걸리기만 해봐라 하고 호시탐탐 벼르고 있었던 터라 오늘의 승리는 우리에게 더 큰 기쁨과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계주에서 승리를 하고 체육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날이면 우리 선생님은 선수들이 팔뚝을 엮어 만든 가마를 타고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 바턴을 거머쥔 두 손을 높이 흔들어 엇갈려 딱딱 마주치며 운동장을 돌고 돌아 우리들 앞에 나타나셨다. 한 마디로 그 순간 우리 담임선생님은 우리학교 영웅이셨다. 그 영웅이 우리선생님이라는 것이 우리 모두를 으쓱으쓱 자랑스럽게 만들었고 행복하게 만들었다. 화려한 고적대를 앞세우지 못했지만 선생님과 달리기 선수들을 앞세우고 학교까지 이어지는 거리 행진은 우리학교가 결코 똥통학교가 아니라 자랑스런 학교임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직도 가시지 않은 상기된 표정의 선생님은 우리들 앞에 두 발을 벌려 버티고 서서 엄숙하게 일장연설을 시작하셨다. 회초리를 든 오른 손으로 왼손 손바닥을 탁탁, 탁 치고는 “너희들 바턴 터치는 운동장에서 선수들끼리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이 교실에서 너희들과 나는 항상 바턴 터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잠시 쉬고 또 손바닥을 탁, 탁, 탁 치고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주고, 받으려면 호흡 맞춤이 매우 중요해, 서로 간의 믿음을 바탕에 깔고, 정확한 준비 자세로 쉼 없는 노력이 필요해.” 이번에는 오른 손으로 회초리를 360〬 회전시켜 원을 그리고 또 손바닥을 탁탁, 탁치고는 “4명이 똘똘 뭉쳐 잠간동안 깜짝 이뤄내는 승리는 어느 것에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진 것임을 어제 운동장에서 보고 느꼈겠지?” 또 손바닥을 탁, 탁, 탁 치고는 “내가 아무리 준비된 바턴을 주어도 너희들이 제대로 받지 못하면 나는 너무 슬퍼 선생 때려치우고 싶다!” 이번에는 침을 꿀꺽 삼켜 평소에 장난스레 얘기 하시던 아담이 이브의 꾐에 빠져 사과를 먹다가 목에 걸려 아직도 넘어가지 못하고 튀어나와 굳어버렸다는 울대뼈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한다. 내가 헛손질을 하지 않도록, 바턴을 떨어트리지 않도록 제발 부탁한다! 이상.” 거듭되는 위협적인 손바닥 치는 소리와 긴장된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들은 겁먹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숨을 죽이고 경청했다. 드디어 회초리를 칠판 옆 제자리 못에 반듯하게 걸어 놓으시고는 “자, 다음은 꿀밤 세례다. 꼴통 검사다.” 하시며 학년 초부터 수시로 해 오시던 우리들 머리통을 주먹으로 툭툭 두들기는 꿀밤 세례를 시작하셨다. “익었냐?, 설었냐?, 꽉 채웠냐?, 빈 통이냐?, 제법 찼네, 아직 멀었다. 익은 소리 나네, 좋은 징조다, 좀 더 힘내…….” 이렇게 짤막한 평을 곁들여 교실 한 바퀴를 도시면서, 때로는 신통방통하다고 볼을 꼬집어 흔들기도 하고, 등을 쓰다듬어 주시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머리통에다 주먹 스킨십을 하셨다. 처음에는 하필 머리통을 쥐어박을까 불쾌하고 싫어서 주먹 꿀밤을 피하려고 이 쪽, 저 쪽으로 머리를 피했지만, 몇 번을 거치면서 우리들은 무슨 행사를 치르듯 얌전히 앉아 오늘은 선생님이 무어라 하실까 꿀밤을 조용히 기다리게 되었다. 꿀밤 세례, 즉 꼴통검사의 목적은 뚜렷하였다. 그 것은 장차 대한민국의 어머니가 될 계집애들의 머리통에서 빈 깡통 소리가 나면 이 나라 대한민국이 도저히 흥할 수가 없으니, 머리통을 알차게 꼭꼭 채우고, 아기들을 슴뻑 슴뻑 낳아 길러 자손만대까지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 하세’를 만들어야 할 무겁고 희망찬 책임이 우리들 어깨에 달려 있고, 아기들 IQ의 60~80%는 어머니의 IQ를 닮는다고 하니 우리들의 머리통 검사를 절대로 빼뜨릴 수 없다고 하셨다. 도무지 실감 안 나는 말씀에 어리벙벙하여 우리끼리 수군수군, 킬킬대며 웃기만 하였지만, 어느새 우리들은 선생님에게 길들여져 무언가 알 것만 같은 눈망울을 하며, 사뭇 숙연하게 머리통 검사에 임했던 것 같다.
그 후 우리는 거짓말 같이 공부를 열심히 했다. 선생님이 넘겨주시는 바턴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여 준비 자세를 갖추며 노력했다. 결과는 의외로 빨리 왔다고 기억 된다. 잦은 일제고사에서 늘 꼴찌를 도맡아 해, 여자 머저리들만 모인 반이라는 오명과 놀림에 대꾸도 변변히 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히고 기가 죽어 있던 우리 반의 평균 성적이 학기 중간부터는 1, 2위를 오르내렸고, 한번 오르기 시작한 사기(士氣)는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했다고 할까. 물론 머저리딱지도 홀가분하게 떼어버렸다. 선생님은 “뚝배기 보다는 장맛이 좋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우리를 격려하면서 고마워 하셨다. 그러면서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으셨고, 우리들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무엇보다 우리들 모두를 6학년 때도 맡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에 우리는 책상위로 올라가 손뼉을 치며 만세를 불렀다. 연거푸 해오던 꼴찌성적으로 벌설 때만 올라가 두 팔을 들고 무릎을 꿇던 책상 위를 기쁜 일로도 올라갈 수 있다니……. 선생님은 우리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시고, 슬픔과 기쁨은 서로 맞닿아 있다고 가르치셨다. 지금 어렴풋하게 알 것만 같은 슬픔과 기쁨이 동전의 양면과 같음을, 손바닥과 손등 같이 앙면성인 것임을 그 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시절이지만, 애틋한 그리움만은 숨길 수가 없다. 나는 선생님의 교육방법이 옳고 그름을 떠나 10~11세 계집애들에게 여성으로서의 몸가짐, 자부심을 갖고 일찍 자존감을 눈 뜨도록 일깨워 주셨고, 바턴 터치를 통해 사람과 사람과의 교감, 신뢰를, 사랑을 담아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셨다고 생각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스라이 떠오르는 국민학교 5,6학년 담임선생님과 얽힌 추억들은 알게 모르게 내 삶속에 깊이 파고 들어와 내 인생에 좋은 자양분이 되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며 선생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한다.
여기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1. 10.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