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부터 내린 비바람에 자태를 한껏 뽐내던 아파트단지 내 목련꽃과 벚꽃들이 떨어져 뒹구는 처연한 모습에서 서양 시인 T.S 엘리어트가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읊었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이번 주만 지나면 '계절의 여왕'이라고 칭하는 5월입니다. 5월은 어린이날(5일)을 비롯해 어버이날(8일), 스승의 날(15일), 성년의 날(21일) 등 유난히 가정과 관련된 사회적 행사가 많아 '가정의 달' 또는 '경로효친의 달'로 불리기도 합니다.
안식구가 동탄 신도시에 거주하는 딸네 집에서 한 달 만에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것이 이틀 전입니다. 모처럼 오랜만에 부부가 함께 일요일 아침을 맞습니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각쯤 되었을까, 거실 전화벨이 요란스레 울립니다. 기상하자마자 슈퍼마켓을 다녀온 안식구가 전화를 받습니다. 마침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검색을 하던 나는 "주말에 온다던 아들이 갑작스런 알로 좀 늦는다"는 내용의 전화려니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수화기를 내려놓은 안식구는 방금 장을 봐온 식(食)재료를 주섬주섬 비닐봉투에 다시 넣더니 "여보 나, 아무래도 신현이 한테 다녀와야겠어요"라고 한다. 뜬금없는 안식구 행동에 나는 잔뜩 긴장되어 묻는다. "신현이 못 온답디까. 아니 안 좋은 일 있습니까?" "글쎄, 목소리가 푹 잠긴 것이 몸이 좋지 않은 것 같네요" "녀석, 그럴수록 집에 와야지, 당신 그 몸으로 괜찮겠어요?" 안식구는 대답을 하지 않고 이내 외출복으로 갈아입습니다.
베란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짙은 운무가 낀 것으로 보아 아직도 이슬비가 내리는 모양입니다. 정년퇴임 후,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이용하지 않던 EF 소나타로 경인전철 부개역까지 안식구를 태워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왕 나온 김에 곧바로 서운동 주말농장으로 달렸습니다. 농장 진입로에는 올 겨울 휴경기(休耕期)에 복토한 흙이 연 이틀에 걸쳐 쏟아진 봄비로 마치 개펄 흙처럼 곤죽이 되어 금방 깨끗했던 등산화며 청바지 가랑이가 흙칠로 범벅으로 되었습니다. 날이 들면 고추, 오이, 가지 어린 싹을 옮겨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이내 귀가하였습니다.
큰 아이 여식은 금(琴)씨 집안과 연을 맺어 출가한 지 5년이 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아 속을 태우고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고희를 눈앞에 둔 우리 부부도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토끼 같은 귀여운 손자 태어나길 기다려왔습니다. 종종 친‧인척 행사나 지우(知友) 모임에서 손자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는 모습이 그렇게도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궁(窮) 하면 통(通)한다'고 했던가요! 속앓이 하던 딸이 지난 3월 초,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손녀를 낳았습니다.
2주간 산후 조리원 생활을 접고 퇴원하는 날, 안식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동탄' 딸네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근 한 달 가까이 홀아비 생활을 하면서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반드시 내주어야 한다"는 세상사 이치를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여식의 산후 조리를 해주고 귀가한지 이틀도 지나지 않아 서울서 혼자 생활하는 아들 전화를 받고 경황없어 하는 안식구 뒷모습에서 짙은 모성애(母性愛)의 진수(眞髓)를 느낍니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우스갯소리가 생겼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 상큼한 신록(新綠)의 달 5월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