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계양산 마니아 역사유적지 탐방
계양산 마니아 역사유적지 탐방
금릉역지/계양구 다남동80-6번지
매 주 금요일은 일명 금사회(金師會)원들이 계양산 입구 연무정 앞에서 만나 계양산 둘레길을 걷는 날이다. 계양산 마니아가 된 지도 햇수로는 어언 9년째가 되는 것 같다. 정년퇴임 후(2006.9) 처음은 건강관리도 하면서 현직시절 알고 지내던 지인들과 어울리는 친목이 주목적이었다. 하지만 부평학 스토리텔러 교육을 접하고 난 후(2014년)부터는 인천의 유일한 진산인 계양산의 역사와 유적을 몸소 찾아 살펴보는 것이 그렇게도 좋을 수가 없다.
스마트 웹 '기상청' 을 열어 검색해보니 '오전은 흐리고 오후에는 눈 또는 비가 내린다' 는 화면이 뜬다. 전 같으면 산행을 아예 포기하거나 아니면 점심시간에 잠시 얼굴이나 내미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고려시대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유지되었던 역참 '금륜역지'를 탐방하고픈 욕심에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섰다. 산행 집합장소인 연무정에 도착하니 일기가 불순한 때문인지 나를 포함하여 겨우 4명이다. 동의를 얻어 계양산 둘레길을 걷다가 무당골에서 다남동쪽 작은 길로 빠졌다.
계양산 둘레길을 벗어나 근자에 새로 포장한 도로를 따라 다암남으로 걷다가 동네 초입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년쯤 되어보이는 두 사람응 만났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이 곳이 '대촌마을'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에 옛날 교통수단이었던 역참이 있었다고 하던데, 혹시 그 위치를 아시는지요?"
"아 거기요, 좀더 걷다보면 북쪽 방향으로 뚫린 길이 나옵니다. 그 길로 5분여 걸어가다 보면 1시 방향으로 논뚝길에 죽은 측백나무 한그루가 서있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바로 그 곳이 역참자리라고 전해옵니다."
지난 주 '안동권씨 묘역' 위치를 찿을 때는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 무던이도 애를 먹었는데, 오늘은 너무나 수월하게 위치를 찿아 발걸음이 가볍다. 설명해준대로 찾아가니 역시 죽은 커다란 축백나무가 눈에 띈다. 하지만 소중한 역사유적지를 알리는 나무표찰 하나 보이지 않아 너무나 안스럽다.
*추기: '금륜역지'와 관련된 글을 인천사연구소 남달우 박사의 연구자료를 인용하여 소개한다.
고려시대부터 시작하여 조선왕조를 거쳐 19C까지 도로의 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전국 도로 요지에 역을 설치하고 역제를 운영하였다. 조선시대는 역로(驛路)행정을 총괄하는 기구는 병조(兵曺)였고 그 밑에서 구체적 실무를 맡던 곳은 승여사(乘與司)였다. 승여사의 관할하에 각 역에서는 역승(驛丞)을 두어 그 임무를 맡게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종 9품의 역승외에 종6품의 찰방(察訪)을 함께 두어 교통행정을 책임지게 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종6품 찰방23, 종 9품 역승 18 등 총 41역도(驛道)에 537개역이 분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경기도에는 영서도찰방(양주 영서역), 양재도찰방(과천 양재역), 평구도찰방(양주 평구역) 중림도역승(인천 중림역) 경안도역승 광주 경안역), 도원도역승( 장단 도원역)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중림도에 속해있는 역으로는 중림역(필자 출생지임), 경신역, 반유역(금천) 석곡역(안산) 금륜역(부평) 종생역(통진) 남산역(양천) 등 7역이다.
역은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변방의 주요한 군사정보 그리고 사신의 옹래에 따른 환송접대를 위하여 마련된 교통통신기관으로 우역(郵驛)이라고도 부룬다. 역은 30리 간격으로 하나씩 설치하였으나 지형등의 형편으로 일정치가 않다. 『부평부읍지』와 『동국여지승람』 역원조(驛院條)에는 '在府北十三里'라 되어 있고 『대동지지』에는 在府北一里로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다남동 大村마을이다.***크리스탈/김청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