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양산에 기댄「부평읍치⌟
계양산에 기댄 「부평읍치」
'부평'이라는 이름은 언제?
부평이라는 이름이 1310년 고려 충선왕 2년 길주목이 부평부로 바뀌면서 처음 등장한다. 하지만 그 이전 한반도에 삼국시대가 성립되면서 주부토군이라는 최초 지명 기록이 김부식이 쓴 정사(正史)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다. 2006년 부평구청에서 발간한 부평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본래 고구려의 주부토군으로 통일신라 경덕왕이 고쳐 장제군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수주군으로 고쳤고 성종 14년에 단련사를 두어다가 목종 8년에 이를 폐지 하였으며 현종 9년에 지주사로 고쳤다. 의종 4년에 다시 안남도호부로 삼았으며 고종 2년에 또 고쳐 계양도호부로 삼앗고 충렬왕34년에 길주목으로 올렸다가 충선왕 2년에 여러 목(牧)을 폐지 하는 바람에 부평부로 삼았다. 여섯개의 현이 속해 있다. -이하 생략-
오늘날 부평은 비록 인천광역시 하나의 기초자치단체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구한말 까지만 해도 조선 왕도인 한성 서쪽지역 대부분을 아우르는 큰 읍치(邑治)였다. 조선조 태종(1410년)때 비로소 이름을 얻은 인천부보다도 무료 100년이나 앞선 역사를 지닌 부평부이다.
조선 후기(18C)의 부평읍치 영향권
풍수로 '부평' 읽기
우리나라 전통도시나 촌락의 입지적 특성을 이야기 할 때, 꼭 언급되는 것이 '뒤로는 명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물을 끼고 있다'는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 설이다. 계양산은 왕도 한성과 강화 섬을 제외하고는 경기 서해안 일대에서 제일 높은 산(394.9m)이다. 따라서 계양산은 일찍부터 한남정맥의 정기를 이어받은 부평의 진산(鎭山) 또는 주산(主山)으로 숭상되어 왔으며 현재도 부평의 랜드 마크로서 시민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계양산은 각 시대 고을 명칭에 따라 수주악, 안남산, 경명산, 계양산 등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고려 충선왕(1310년) 때 고을 이름을 부평부로 바꿨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산 이름은 부평산으로 바뀌지 않고 계속해서 오늘날까지 계양산으로 불려지고 있다.
고양골 양궁장에서 바라 본 계양산 모습
고려의 대문호 백운거사 이규보의 망해지(望海誌)에 이르기를 '계양지경에는 길이 4면으로 놔 있는데 오직 한 면만이 육지로 통하고 나머지 3면은 모두 물이다’라고 읊은 것으로 보아 당시 계양산은 북, 동, 서는 모두 물로 둘러싸여 있고 오로지 남쪽만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음을 유추해 볼 수있다.계양산 주봉 동쪽에 있는 고산성(古山城)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머물면서 온갖 악행과 노략질을 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계산동에서 서구 공천동으로 넘어가는 징매이고개는 구한말 박희방 부평부사가 고을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축조한 중심성(衆心城)과 성문 공해루(控海樓)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계양산 동쪽능선의 고산성(古山城) 모습
계양산 서쪽 좌청룡(左靑龍)격인 중구봉(200m) 아래 온수골은 고려 의종(1165년) 때 선곶이(이화리)에 있던 안남도호부 청사와 향교가 옮겨온 곳으로 이규보 부사가 1년 2개월여 머물렸던 일명 자오당(自娛堂) 터가 있다. 그리고 동쪽 기슭에는 경인교육대학과 병자호란 때 완전 소실된 향교를 재건(숙종14년)한 부평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재부서(在府西) 2리로 기록되어 있는 부평향교
부평도호부청사는 부평초등학교에 가면 볼 수 있다. 본래 부평도호부 청사는 23동 234칸의 큰 규모로서 욕은지 근처의 자웅 두 그루 은행나무 수령이 600년쯤 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조 태종13년 (1413년) 도호부로 승격된 후 건축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부평읍치의 심장부인 도호부(동헌)을 철거하고 학교건물을 지었다. 1968년 6개 목조교실이 노후되자어 현재의 북쪽 연와조 건물을 신축할 때 ㄱ자형 내아가 운동장 한 복판에 외따로 남게 되자 할 수 없이 욕은지 옆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장소도 협소하지만 당무자의 무지로 -자형으로 세워져 그 원형을 잃고 세워진 것이 오늘의 부평도호부청사로 불러오고 있다. 그나마 남아 있던 건물을 지키지 못한 문화정책에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부평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부평도호부 청사
풍수 비보(裨補)를 위한 부평 오조산
풍수를 통해 읍치를 논할 때, 흥미로운 것 중에 하나가 부족한 자연조건을 보충하려는 풍수적 대응 즉 비보(裨補)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힘으로 만든 조산(造山)이다. 일찍이 계양산 자락에 자리잡은 부평읍치는 후면은 명산 계양산이 아늑하게 받쳐주고 있으나 전면은 감싸 안아주는 산세가 없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안산 역할을 하는 인공 산을 그것도 무려 다섯 개의 산(五造山)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풍수 비보의 종류 및 방법은 지역마다 다양한데 부평지역처럼 여러 개의 조산이 등장하는 사례는 극히 들물다.
1호 조산(대) | 계산동 23-3번지 |
2호 조산(대) | 계산동 60번지 |
3호 조산(소) | 계산동 41번지 |
4호 조산(소) | 계산동 63번지 |
5호 조산(소) | 계산동 64번지 |
인천계양 코아루 센트럴 파크 앞의 오조산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