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학

[스크랩] 토굴 속에 담긴 부평이야기

길전 2017. 5. 7.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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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굴 속에 담긴 부평이야기




 부평인문도시발굴단은 금년 4-5월 매주(토)10~12시 일반시민. 학생을 대상으로 하여 부평구·계양구 일대 현장 역사탕방을 하고 있다. 주초에 다음과 같은 안내 문자가 스마트폰에 떴다.  

  

    일시/2017년 5월 6일 오전 10시~12시.

    모이는 곳/인평자동차정보고등학교(산곡3동)

    개인준비물/장화, 손전등.

       ***장화없이는 토굴 입장이 불가능합니다***


 6.25 전쟁 후, 상이군경용사들의 삶의 터전이였던  옛 화랑농장 부근에 토굴이 여러 있었음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번 부평지역 토굴 탐방을 통해서 한남정맥 줄기인 함봉산(지금은 선포산으로 불림)에 무려 24개의 토굴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평문화원 김규혁기획탐사팀장이 나눠준  "부평토굴" 안내도에서



●●● 이 많은 토굴들을 언제 누가 팠을까!!


구한말,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연달아 승리하면서 대륙 진출을 위해 대한제국을 강탈한 후(1910, 한일합방) 일본군을 인천과 부평지역에 주둔시켰다. 그것은 부평이 서울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며 또한 중국으로 가는 인천항이 아주 가까운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육군조병창이라는 병기제조창을 부평에 세우고(1939년) 용역근로자 숙소인 일명 조선영단 주택(6~8평 규모)를 대량(1096호)으로 지었다.  아마도 부평토굴은 이 당시에 생산된 무기와 탄약을 저장하고 아울려 인명 대피시설로서 당시 조선인들을 동원하여 파기 시작했다는 것이 인근 주민들의 채록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평토굴 중에 하나인 토굴C5 의  정문 모습

 


실제 탐사한  C7 토굴 안의 모습(김규혁 기획탐사팀장 안내)

●●●그동안 토굴들은 어떻게 이용되었나?


  부평토굴은 광복후 본래의 이용가치가 소멸된 후, 지금까지 근 80여년동안 마을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우선 변질되기 쉬운 물건들의 저장 창고와 서해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새우젓 숙성 등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이밖에도 혹서기에는 일부 마을사람들에게 시원한 피서지 역할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오늘 몸소 탐사한 C7 토굴 내부는 드럼통괴 비닐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는 것으로 보아 새우젖 굴로 활용된 것이 분명하다. 이 밖에도 여기 저기 뚫려있는  착암기 흔적, 지지목으로 사용하기 위해 쓰린 것으로 보이는 말뚝 , 가지 굴을 파다 남은 흔적과 다이나먼트 폭파의 흔적으로 쌓인 돌무더기 등이 일제 강점기 시절의 참혹했던 우리 선조들의 당시 생활상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토굴 천장에는 비록 천연동굴에서 볼 수 잇는 것처럼 크지는 않지만 아주 작은 종유석이 만들어 지고 있음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C7토굴 천정에서볼 수 있는 종유석 모습   



●●●토굴의 의의와 교육적 활용 모색


 경기도 광명시에 있는 광명동굴은 금광산으로 유명세를 타다가 페광된후 새우젖 숙성굴로 이용되어왔다. 하지만 지자체에서 관광 콘텐츠로 개발하여 지금은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제주의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지하벙커,  포천의 방어벙커, 옛목포 영사관 뒤편에 있는 목포부청 방공호 등도 현재 등록문화재로 되어 있다고 한다. 부평토굴 역시 인천의 등록문화재로 인정받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진 일본육군조병창과 삼능 구사택, 그리고 산곡동 조선영단주택, 부평가족공원내에 있는 폐광산을 묶어 하나의 토굴 문화콘테츠로 개발한다면  광명동굴 못지않은 효과가 기대된다. 특히 자라나는 인천· 부평지역 청·소년들에게 매우 소중한 교육적 체험코스가 될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그런 방향으로 추진될 것이라 하니 매우 반갑다. ***크리스탈***


부평토굴 탐사에 참여한 회원들(앞줄 앉은 사람 네번째가 필자)    





출처 : 경인두리회
글쓴이 : 김청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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