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인천李씨 시조 묘역 원인재(源仁齋)
인천李씨 시조 묘역 원인재(源仁齋)
정유년 마지막 12월도 열흘이 채 안 남은 21일(목)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 등산복 차림의 오성회원들(부평관내 이웃학교에서 비슷한 시기에 함께 근무한 지인들)이 인천 지하철 1호선 원인재 역에 모였다.
원인재역은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인천 서해안지역로서 갯벌의 조개류를 채취하는 것이 주 소득원이었던 어촌마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갯벌을 매립하여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거기다가 인근 송도에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인천의 모습을 크게 바꿔놓아 이른바 상전벽해(桑田碧海) 라는 표현이 적절한 곳이다. 이 곳에 인천이씨 시조 이허겸의 묘역이 자리 잡고 있어 인천도시철도 1호선이 개통(1999.10) 되면서 원인재(源仁齋)역이라는 역명이 붙게 되었다.
인천 李씨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후예로 비조(鼻祖) 허기(許奇)에 이르러 唐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파견되어 당 현종을 호위하게 되고 그 공로로 황제의 성인 李씨 성을 받고 五言詩를 갖고 돌아와서 소성백이 되었다. 그 자손이 대대로 소성(현, 인천)에 세거(世居)하다 고려 현종조 이허겸(李許謙)에 이르러 소성후(邵城候) 식읍 천오백호에 봉해지면서 소성(인천)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인천은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인데 신라 경덕왕이 소성현으로 고치고 고려 숙종 10년(1105)에 어머니인 인천이씨 인예태후의 고향으로 경사의 근원지라 하여 이름을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하였다 인조조에는 어머니 문경태후의 친정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불렸으며 공양왕2년(1329)에는 고려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인주가 왕의 어향이라 하여 경원부로 승격하였고 7대어향이라 불렸다. 그 후 조선 태종13년(1413)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인천(仁川)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따라서 인천이씨 본관도 소성, 경원, 인주, 인천으로 바뀌었다.
원래 원인재는 연수동 신지마을(현재,인천적십자병원 인근)에 소재하였으나 1994년 택지개발로 해체되어 현재 장소인 묘역 옆으로 옮겨져 복원 및 중축되었다. 묘역에는 ①신도비를 비롯하여 ②첨소문, ③방지, ④돈인재, ⑤승휴당(동재) ⑥율수실(서재), ⑦원인재, ⑧화장/비품실 ⑨경선문, ⑩관리동, ⑪신앙문, ⑫시조공비, ⑬시조공묘, ⑭신신재단, ⑮이인로 문학비, 등이 인천이씨 일족의 헌신적인 성금과 인천시의 보조금으로 조성되어 있다. 현재 원인재는 인천 지방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