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洞, 高宗皇帝의 길을 가다.
貞洞, 高宗皇帝의 길을 가다.
인천교육삼락회 제38회고적답사가 춘분을 하루 앞둔 3월 20일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 소공동 일원에서 시행되었다. 이 곳은 구 한말, 기우려져 가는 국운을 지키고자 철치부심했던 고종황제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지역이다. 오늘 고적답사는 고종이 잠시 몸을 피했던 소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라고 칭하는 구, 러시아공사관과 을사늑약 체결의 아픔이 서린 중명전(重明殿) 그리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환구단(阛丘檀) 답사다. 이 중에서도 압권은 뭐니 뭐니해도 중명전(重明殿)이다.
구,러시아공사관 전망대 모습 복원된 중명전 모습 환구단 황궁우 모습
중명전(重明殿)
중명전은 덕수궁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정비해가는 과정에서 황실의 서적과 보물들을 보관할 황제의 서재로 지어졌다. 1904년 덕수궁에 큰 불이 일어 고종이 이곳으로 이어하면서 편전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한 일본의 강압 속에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주권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각계에서 조약 채결 반대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1907년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이어 친일내각을 앞세워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잠식하는 여러 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행정, 사법,군사권을 장악당한 대한제국은 결국 1910년 1910년 일본에 병합되었다.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다. 1907년 고종이 황위를 아들인 순종에게 물려준 뒤, 덕수궁으로 궁궐의 이름을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종명전의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다. 황제 서재의 용도로 지으면서 수옥현이라 이름 지었으나 고종이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1906년 경 중명전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하였다.
***크리스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