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 만큼 보인다'
우암 송시열선생의 최초 유택지가 '화성동탄'
화성시 동탄에 자리잡은 지 이 달(7월) 말이면 4개월째로 접어든다. 이주(移住) 초에는 생소(生疎)하기만 했던 동탄내 자연환경과 주요 건물들이 이제는 친숙하게 하나 둘, 눈에 들어온다. 인간은 물론 생명을 지닌 모든 생물들이 이질적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최근 신도시로 탈바꿈하는 화성 동탄은 북쪽은 수원 영통구와 가깝고, 동쪽은 무봉산(360.2m)을 경계로 용인 기흥구, 그리고 남서쪽으로는 필봉산(144.2m)을 경계로 오산시와 접하고 있다.
며칠 전 지인으로 부터 와사보생(臥死步生)이라는 문자를 받았다. 우리네 실버들! 많이 움직이라는 권유의 글이다. 어제 온종일 내리던 장맛비가 오늘은 좀 뜸하다. 서너시간 걸을 요량으로 점심식사 후, 3번째 무봉산 탐방에 나섰다. 집을 나와 동부대로, 경부고속도로, 동탄대로 밑을 통과하여 무봉산에서 오산천으로 연결되는 지동천변으로 들어섰다. 지동천 1橋와 2橋를 지나니 좌측으로 작은 개울물이 흐르는 하천이 또 나타난다.
성격이 특이하다고나 할까, 아니면 호기심이 많다고나 할 까? 한 번 걸어 본 길은 웬간해서는 두 번 걷지 않는 버릇이 있어 오늘은 왼쪽 선납천변으로 들어서 1km 정도를 걸었다. 잘 조성한 선납 저주지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런데 더 반가운 것은 선납지 바로 앞 둔덕에 붉은 색 홍살문과 우암정(尤庵亭)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정자가 보이는 것이다. 우암(尤庵)은 조선후기 주자학의 대가이자 노론의 거두로서 문묘와 종묘 종사를 동시에 이룬 6현 중 하나인 송자 송시열(1607~1689) 선생의 호(號)가 아닌가!!
'아는 것 만큼 보인다, 는 말이 있다. 부평학 스토리텔러 활동을 하기위해 심화과정으로 부평향토사 탐방교육을 수강할 때 들었던 말로 기억된다. 화성동탄에서 우암 송시열 선생의 삶의 흔적을 접하다니 너무나 신기하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다. 정자 출입문 좌·우 대리석판에 새겨진 우암 선생에 관한 기록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디-카에 담았다. 우선 무봉산의 원래 이름은 만의산(萬義山/대동여지도)이었는데, 송자(우암)선생께서 1663년 후학을 위해 인재육성 강학(講學)을 하시면서 '봉황이 춤을 추는 형태의 산' 이라 하여 무봉산(舞鳳山)으로 개명하였다고 적혀있다
또한 무봉산에 송자 선생이 생존하실 적 유언에 의해 묘터를 점지하고 현종(10년)께서 확정하시었다. 그리고 숙종때 귀양지 정읍에서 83세에 수명(壽命)하시어 무봉산에 유택이 68년간 계셨으나 영조(32년)께서 국장으로 괴산 청천(1757년) 이장되었으며, 그 자리에 원각사가 들어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동탄 무봉산은 우암선생께서 인재육성과 효종 때 북벌을 준비하시던 한양도성과 지근거리에서 효종의 밀찰을 받기위한 유서 깊은 장소로서 조선의 자주적 문화 중심의 부흥을 효종과 더불어 꿈을 이루기 위한 곳 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옛 말에 소년 장원(壯元), 중년 상처(喪妻), 노년 빈곤(貧困) 3가지를 이르러 '3대 악재(惡材)' 라 칭하는 말이 있다. 사색 당파가 극심한 조선 후기, 스승 김장생·깁집의 문하생으로 일찍기 장원 급제하여 네 명의 군주(인조, 효종, 현종, 숙종)을 모신 송자(우암) 송시열 선생이 종당에는 사사(賜死)로 삶을 끝냈어야 함을 세상 사람들에게 긱성(覺醒)시키는 경구(警句)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이웃)이 잘 되는 걸, 못 보고 못 참는 우리 민족의 고질적인 병폐!! 언제나 사라지려나^^^ ***크리스탈/명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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