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奧地)학교에서 라면을 먹던 생각을 하면서.../2021.3.30.(화)
첫 주가 시작되는 3월 29일(월) C일보 경제섹션 지면에 ‘사나이 울리고 떠난 라면 왕’ 이라는 타이틀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56년간 외길 《농심》을 이끌며 국내 1위, 세계 5위라는 ‘라면' 신화를 창조해낸 신춘호(92세)회장이 지난 주 27일(토) 별세했다는 글과 더불어 그가 세계 최고의 ‘라면 왕’에 등극하기까지의 과정이 디테일하게 기록되어있다.
농심회장 별세에 관하여 내가 궂이 이 글을 쓰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인천교대를 졸업(1965.2)하고 첫 발령지는 경기도내에서 오지(奧地)로 소문난 가평군 운악산 자락의 『운악초교』였다. 그러나 안타갑게도 모든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인 국토방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부임한 지 채 한 달도 아이들과 생활하지 못하고 軍에 입대하여야 했다.
30개월의 軍 복무를 마치고 복직(1967.10)한 학교는 역시 가평관내 경춘가도변의 『상천초교』이다. 처음에는 학교청부 아저씨 댁에서 지내다가 마침 학교 관사에 자리가 나서 자취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결혼하기 전까지 장장 9년간 이 생활이 지속되었다.
당시에는 학교단체급식이란 것이 시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점심시간이면 아이들이나 담임교사나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 일과를 이어갔다. 다만 거리가 먼 아이들은 도시락을 지참하였다. 나는 밥 짓기가 귀찮다 싶으면 라면을 끓여먹고 출근하였다. 이런 날은 당연히 점심 아니 저녁까지도 라면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라면 1박스를 구입하면 열흘 가기가 어려웠다. 어머니께서 담가주신 20여포기에 달하는 배추김치가 설(舊正) 전에 동이 났다. 이 때 먹었던 라면 총량을 대충 따져보면 아마도 5톤 트럭 한 대분은 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음식만 계속 먹으면 질려서 냄새도 맡기 싫을 텐데, 나는 지금도 밥 대용식으로 라면을 자주 먹는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절실한 것이 의·식·주이다. 이 중에서도 ‘식(食)’ 이 가장 중요하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즘 소위 MZ 세대들은 ’보리 고개’ 라는 생소한 어휘를 잘 모를 것이다. 쌀이 부족하여 혼 · 분식을 장려하고 도시락 검사까지 하였던 당사자로서 요즘 바뀐 외식를 이따금 하다보면 나름대로 느끼는 소회(所懷)가 참 많다.
자본금 500만원으로 시작한 《農心》이 우리 국민들의 입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연매출 2조원이 넘는 회사로 키워, 전 세계 100여국에 辛라면 블랙을 수출하여 세계 최고 라면으로 올려놓는데 온 정성을 쏟은 신춘호 농심(農心)회장님이라 말로 국부(國富에) 기여한 진짜 으뜸 애국자가 아닐 수 없다. 삼가 조의(弔儀)를 표하며 고인의 유덕(有德)이 후세에 이어져 더욱 빛나기를 기원하면서 글을 마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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