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깊이 숨겨두었던’ 두 번째 이야기/2021. 7.12(월)
가평 오지학교에서의 "사랑" 이야기
사람은 누구나 처음 인연을 맺었던 사람이나 장소는 쉽게 잊혀지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의 최초 부임지는 가평 운악산 자락에 위치한 작은 규모의 W학교이지만 한 달도 못 채우고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특별한 추억거리가 있을 턱이 없다. 2년 6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1967.10.1)한 곳이 바로 경춘가도 변의 S초등학교이다. 말이 복직이지 초임학교나 진배없다.
'산전수전' 이라는 한자 숙어가 있다, 세상사 어려운 고비를 다 껶어 본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나는 S 학교에 5년 6개월간이라는 적지않은 기간 근무하면서 온갖 경험을 다 하였다. 해마다 학교장이 바꿔 다섯 분의 교장을 모셨다면 긴 설명이 필요치 않으리라 생각된다. 가정사로는 대들보인 아버지께서 52세라는 많지 않은 연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실은 어제가 마흔 여덟 번째 맞이하는 아버지 기고일이다. 어머니께서도 단명하시어 58세에 작고하셨다. 어찌 보면 나는 큰 불효자이다. 팔순을 앞둔 지금까지 살아 숨쉴 수 있는 것이 오로지 두 분 음덕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우선 S 학교에 근무하면서 크고 작은 여러 사건들이 있었지만, 정년퇴임시 때 발간된 수필집에 소개되어 있다. 다만 지난번 '108학급 학교 이야기' 에 이어 이 번 두 번째 이야기는 오늘 처음 소개되는 이야기다.
군 복무를 필 하고 복직하자 5남매의 맏이인 나를 장가부터 들여야 한다고 집안 어른들이 서두르신다. 실제로 여러 군데서 혼처들이 오갔다. 하지만 나는 중신(소개)을 통한 결혼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내가 직접 접해 본 사람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택해 평생 배우자로 함께 하고 싶었다. 집안 어른들께서는 몰래 숨겨둔 여자가 있다는 오해아닌 오해까지 하셨다.
S학교에 복직한 지 2년쯤인가, 모교 후배 여선생이 부임하였다. 날씬한 몸매는 아니지만 믿음직하게 느꼈다. 먼저 온 선배로서 학교 일에 힘들어 할 적마다 성심 성의껏 도와 주었다. 심지어 공휴일 일직 근무도 대신 해줬다. 인간관계란 참 묘한 데가 있다.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자주 접하다보니 없던 정분도 생기나는 것이 남녀간의 '관계' 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금방 교내는 물론 동네까지 소문이 났다. 요지는 '상대방은 떡 줄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내게 있다' 고 해야 할 것 같다.
당시 J교장님은 두 사람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2학기 초에 Y여선생을 관내 타 학교로 전출시켰다. 지금까지 해소되지 않는 의문이 있다. 정작 전출되어야 할 당사자는 '나'인데 불구하고 왜 하필 Y선생을 전출시켰는지? 그것이 지금도 의문 부호로 남는다. 그 후 Y선생과의 만남은 영원히 단절되었다. 사실 이 이야기를 안식구가 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른다. 하지만 부부간에 어떤 사소한 비밀이 없이 진솔하게 지내는 것이 온전한 부부애가 아닐까! 황여사는 충분히 이해하리라 믿기에 이 글을 쓴다.
S 학교에서 두 번째 이야기는 어머니와 연관된 이야기다. 부친이 작고하신 후, 인천 본가에서 동생들과 함께 생활하시던 어머니께서는 밑반찬을 장만하시어 내 자취방을 자주 방문하셨다. 일단 오시면 보통 4~5일간 머물다 가시곤 하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신 지 하루 만에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가셨다. ‘뭔가 서운 하셨나? 아니면 갑자기 본가에 급한 일이 생기셨나?' 하는 별별 생각이 들었지만 잠시 잠간이었다. 그런데 내가 S학교를 떠난 후에야 그것도 어머니의 말씀을 통해서 당시 상황을 알게 되었다.
“지연 에비, 상천서 혼자 자취할 때, 애지중지하던 금반지 잃어버려 무척이나 서운 했었다”
“아니 어쩌다 그처럼 귀히 여기시던 반지를...”
“방청소 하고 걸레를 빨러 개울에 갔었지! 반지가 닳을 것 같다는 생각에 손가락에 낀 반지를 빼서 돌 위에 올려놓고 그냥 왔지 뭐냐! 뒤늦게 생각나서 그 자리에 가보니 반지가 보이지 않더구나, 어찌나 서운하던지^^ “
“그래서 그 때 일찍 가셨군요,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반지 잃어버렸다고 하면 네 마음이 편하겠니!! 오직 못났으면 반지 빼 놓고 다닌다고 동네사람들한테 흉이나 잡히지”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일은 자연스런 일이지만, 자식이 부모사랑하기는 어렵다' 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어머니께서는 뜬금없이 반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자식인 내가 알았다면 틀림없이 잃은 반지를 찾기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생각에 섭섭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음 날 일찍이 귀가 하셨던 것이다. 한 번 잃은 물건을 다시 되찮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자칫 나의 이미지(인상)만 나빠질 수 있다. 정말 잘 하신 처신이시다. 지금 당시의 어머니 생각을 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짠(울컷)해진다.
"어머니, 이 불효식이 정녕 뵙고 싶습니다"
초등학교 음악교재에 실린 윤춘병 작사·박재훈 작곡의 ‘어머님 은혜’ 노래를 생각하면서 글을 접는다.(끝)
사진: S 초교 교직원 사진(중앙 정장 차림이 필자)
(244) 어머님 은혜 - 윤춘병 작사 / 박재훈 작곡 / Violin 연주 / 악보 / 가사 / 음이름 (계이름) / 노래 연습과 반주(MR)로 가능 / 동요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