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思

[스크랩] 충견(忠犬)과 선(善)한 품성

길전 2012. 1. 26. 01:09

충견(忠犬)과 선(善)한 품성
[기고] 김청규 / 전(前) 인천부마초등학교장


새벽녘에 눈을 뜨면 아파트 출입문 앞에 놓여 있는 신문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이 요즘 내 일과의 시작이다. 예전에 비해 요즘 신문은 지면 양이 늘어 이를 꼼꼼하게 읽다보면 오전 한나절은 홀딱 지나간다.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耳順)이 지나 '뜻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종심(從心) 나이에 접어드니, 우선 시력이 약해 돋보기안경 없이는 신문보기도 힘들다. 자연스럽게 관심 가는 정치인 동정기사와 더불어 오피니언 지면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여타지면은 대충 넘어간다.

며칠 전 신문기사 중 특히 이목을 끄는 기사는 '산에서 쓰러진 노인, 몸으로 지킨 강아지'라는 사회면 기사다. 기사내용이 어쩌면 고려시대 문인 최자(崔滋)가 쓴 보한집(補閑集)에 기록된 전북 임실군 '오수의 개' 이야기와 흡사하지만, 조금 다른 것이 있다. '불이 난 것을 모르고 잠든 주인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평소 치매가 있는 할아버지가 집에서 300m 떨어진 야산 능선에서 저체온 증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어가는 할아버지를 함께 따라나섰던 강아지가 옷을 물어뜯고 혀로 얼굴을 핥아 엄동설한에 자칫 변을 당할 뻔하였던 노인을 구했다'는 요지의 글이다. 

요즘 학교 내 왕따와 폭력사태로 대다수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는 차제에 한갓 미물(微物)에 불과한 '개'가 인명(人命)을 구했다는 사실은 정말 생동감 있는 빅 기사가 아닐 수 없다. 어찌 보면 손자삼우(損者三友)에서 양두구육(羊頭狗肉)의 탈을 쓴 편벽(偏僻)적인 인간보다는 훨씬 우러러 볼 충견(忠犬)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견원지간(犬猿之間)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개와 원숭이 사이'라는 뜻으로 서로 사이가 나쁜 두 사람의 관계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필자는 출생 띠가 갑신(甲申)생이라 그런지 개(犬)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슬하에 두 아이가 초등학교에 적을 두던 무렵, 이른 봄이면 자목련 향(香)이 집안 가득했던 인천 서구 석남동의 서구(西歐)풍 단독주택에 살던 때였다. 안식구도 함께 직장에 나가 항상 집안이 호젓하여 삽살개 한 마리를 얻어 키웠다. 유난히 털이 희고 긴 강아지는 식구들이 외출해서 돌아오면 어찌나 반갑게 덤벼드는지, 특히 두 아이들이 무척 애지중지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개가 보이지 않아 잃어버린 것으로 단정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아주 초췌한 모습으로 사라졌던 개가 나타났다. 무척 반갑고 기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품이 아주 사나워졌다. 대문 밖에 인기척 소리만 나도 미친 듯 짖어댄다. 급기야는 이웃 집 노인을 물기까지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예방접종을 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아무튼 이 일로 인해서 개를 없앴다. 아마도 몸보신용으로 명을 다한  듯싶다. 눈이 퉁퉁 붓도록 울던 두 아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후로는 공동주택에서 생활하다 보니 강아지를 키울 필요가 없었다.  심야에 이따금 개 짖는 소리가 들리면 오히려 심기가 불편하다. 아파트 승강기 안에서 애견을 안고 있는 것을 보면 '동물에게 저렇게 하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고 하더니 요즘 뜬금없이 강아지를 키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갑자기 마음이 바뀐 요인을 구태여 찾자면 서운동 주말농장 인근에 있는 철물공장 강아지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람이나 가축이나 자주 접하다 보면 정(情)이 들게 마련인가 보다. 듬성듬성 박혀 있는 얼룩무늬가 흡사 서울 동물원에서 본 늑대처럼 보이지만 주말농장에 갈 때마다 꼬리를 치며 반긴다.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도 있다'고 했던가. 집에서 모처럼 육식하는 날은 주말농장의 공장 얼룩개도 영양식을 하게 마련이다. 어쩌다 빈손으로 주말농장에 가면 반갑게 꼬리를 흔들다가도 이내 실망하는 표정이 나타나 안쓰럽기 그지없다. 언젠가 서울 남산공원에서 동기 친목모임이 있던 날, 주인 모르게 돼지족발을 싸가지고 온 일도 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사자성어는 '여우가 죽을 때 자기가 태어난 쪽으로 머리를 향한다'고 해서 생겼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어찌 늘그막에 선(善)한 품성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가. 오늘 아침 백두대간 넘어 강릉의 충견(忠犬) 기사를 보면서 흙냄새 물씬 풍기는 안마당에 하얀 바둑이가 더욱 그립다.

출처 : 부평시니어기자단
글쓴이 : 기자 김청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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