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부평구정 소식지에 기고한 글을 모아 펴낸《부평낭만》 1편 “행복한家”에서 옮긴 글입니다, 근자 불편하게만 느끼는 시부모와 며느리가 한 집에 동거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샘이 날 정도로 너무나 행복하게 느껴 소개합니다. ***크리스탈***
어느 비 내리던 날의 오후
+글쓴이/박영애(산곡동)
언제나 유머가 넘치는 아버님께서 이제 막 외출에서 들어오셔서는 문득 그러셨다.
“애 에미야, 내가 속이 좀 거북한 것 같구나.”
“지난번에 술 남은 거 거기 있지?”
순간 “네” 하고 주방으로 향하던 내 걸음이 마치 뭐가 놀란듯움찔 멈춰섰다. 아버님께서는 늘 그렇게 소주 작은 병 하나씩을 사다 놓으시고는 가끔 적절하실 때나 아니면 오늘처럼 속이 거북하실 때 한두 잔씩 드시곤 하셨는데, 그저께의 술이 아직 반병정도가 남아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계신 거였다.
한데 사실 그 술은 어제저녁 무렵에 친구가 찾아와 속상한 애기를 들어주던 중에 둘이서 몰래 홀짝홀짝하다 보니 다 없어져 버렸는데, 내가 그만 깜빡 잊고 새로 사다 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황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야 금방이라도 사 오면 될 일이었지만 그렇게 되면 당신께서 눈치를 채실 것은 뻔한 상황이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아범도 약을 먹는 중이었으니 그 핑계를 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급한 김에 애꿎은 아이를 둘러댔다. 이미 내 목소리는 적잖이 떨리고 있었다.
“저 아버님, 그 술은 제가 깜빡 잊고 식탁 위에 두었는데 수진이가 그만 쏟아 버렸나 봐요.”
“제가 금방 가서 다른 거로 한 병 사오겠습니다.”
하고는 어느새 이마에 맺힌 땀을 한번 쓱 훔치는데, 아버님께서 그러셨다.
“아- 그랬어? 그래 , 그럼 가서 다른 거로 하나 사오렴.”
그제야 내 입에서는 작은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일단 위기는 잘도 벗어난 듯싶었다. 한데 이 이을 어찌할꼬.
당신께서는 방 안으로 들어가시다 말고 빙그레 웃으시며 결정적인 말씀을 딱 하시는데, 바로 아버님의 그 한마디가 안 그래도 저린 소주 도둑(?)의 발을 더욱 더 저리게 만들고야 말았다.
“근데 에미야, 요새 뭐 아범이 속상하게 하는 일 있냐?”
역시나 우리 아버님이셨다.
당신 며느리의 허물을 오히려 재미나게 덮어 주실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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