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적답사

[스크랩] (제24회)고적답사/고양향교와 벽제관지

길전 2018. 2. 22. 00:23

인천교육삼락회 (제24회)고적답사

고양향교와 벽제관지



인천교육삼락회 고적답사(동아리회장, 박춘식) 회원 8명이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벽제관지(碧蹄館址:사적 제144호)와 고양향교(高陽鄕校:문화재자료 제69호)를 답사했습니다.


 고양시 고적 탐방은 2016년도 8월의 공양왕릉의 탐방 이후 두번째 답사입니다. 집 앞(갈산동 천주교성당 버스정류장)에서 1시간에 두번씩 운행하는 3700번 시외버스를 이용했는데  답사위치인 고양시 덕양구 고양시장까지 장장 2시간이나 소요되었습니다. 


 고양의 본래이름은 벽제(碧蹄)였으나 고(高)씨와 양(陽)씨 집성촌 두 마을을 합쳐 고양(高陽)이라는 지명으로 개칭되었다는 사실 이 번 탐방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고양 벽제관(碧蹄館)지는  조선시대 역관(驛館) 터로서 중국을 오갔던 고관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조선시대는 한양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의주로에 역관이 10여군데 있엇는데, 한양에 들어가기 하루 전에 반드시 이 곳 벽제관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예의를 갖추어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또한 중국으로 가는 우리나라 사신들도 이 곳에서 머물렀다고 합니다. 지금의 벽제관터에는 인조3년 (1625년)고양군의 관아를 옮기면서 지은 객사자리를 일제 강점기에 건물의 일부가 헐렸고 6.25전쟁때 삼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들이 불타 버려 현재는 터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어서 답사한 고양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9호)는 처음 서삼릉이 있는 곳에 건립되었으나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가 승하하면서 장지로 결정되자 대자동의 古邑마을(웃고골)로 이전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평향교와 마찬가지로 임진왜란때 벽제관 부근이 격전지가 되면서 모두 소실되었으나 조선 숙종 때,  현 위치에 다시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향교의 구조 건물배치는 부평향교와 똑같이 전학후묘(前學後廟)로 되어 있습니다. 즉 외삼문을 지나 앞쪽에 강단(講壇)인 명륜당(明倫堂)과 기숙사인 동재(東齋:양반자재 숙식) 서재(西齋:평민자재 숙식)가 있고  뒤쪽에 내삼문을 지나  대성전(大成殿:공자,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배향)과  동무(東廡:설종외19인 위패) 서무(西廡:최지원외 19인 위패)와  전사청(典祀廳:제사 준비하는 곳)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부평향교와 다른 점은 교직사(校直舍:향교의 살림을 맡은 곳)와 존경사(尊經閣:서적제작·발행에 사용하였던 경판을 보관하는 곳)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 답사를 통해서 향교 공간배치 방식(前廟後學 또는 右學左廟)이 일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나에게는 큰 소득이었습니다. 


 다음 답사는 3월 28일(수) 답사위치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63-1, 산 77번지에 있는 정의공주 묘(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0호)와 연산군 묘(사적 제362호)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 보이는 만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회원들을의 참여을 기대하면서 디-카에 담은 사진 동영상으로 편집하여 소개합니다

                                                                                                                   ***크리스탈***









출처 : 인천교육삼락회
글쓴이 : 크리스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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