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군 첫 참전지 오산 죽미령을 찾다.
참 시간은 잘도 간다. 庚子년 첫 뜨는 해를 바라 본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어느 새 한 해 절반이 흘러 '나라 사랑의 달' 6월이다. 요즘 청·소년들은 6.25라든지 현충일을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돌어가신 날로 잘못 알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접하면서 '가르치는 일' 에 종사한 당사자로서 심한 당혹감과 더불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지닌 것이라고는 "시간' 뿐인 나는 자전거를 끌고 동탄 이웃에 자리 잡고 있는 오산 죽미령전투지를 찾아보았다.
**6시간 15분간의 전투, 죽미령**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고개에서 유엔군과 북한군의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7월 5일 새벽 3시, 빗속을 뚫고 죽미령 고개에 도착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도로와 철로 부근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도로를 포함한 좌측 능선에 B중대를, 철로 좌측 편에 있는 진지 내 우측 고지에는 C중대를 배치하고, 105mm 포대를 죽미령 후방에 포진시켰다.
오전 7시 수원근처에서 북한의 전차부대의 모습을 드러났다. 8시 16분 첫 사격을 시작으로 스미스 부대는 포탄을 쏘아대며 공격하였지만 소련제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오전 10시, 약 10km에 달하는 긴 행렬의 북한군 트럭과 보병이 나타났다. 3대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보병을 향해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아댔고 아군, 적군을 가릴 것 없이 수많은 병사들이 쓰러져 갔다.
그러나 북한군이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퇴로를 차단하고 동시에 전차가 중앙을 돌파하면서 방어선은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탄약과 병력이 소진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2시 30분 퇴각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540명 중 보병 150여 명, 포병 31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으며, 북한군 역시 약 5,000명 중 15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유엔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는 승패와 관계없이 유엔군의 참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북한군은 미군이 참전하지 않거나 적어도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 하에 남침을 감행 하였는데, 남침개시 10여 일만에 미 지상군의 참전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유엔군의 파병은 유엔 창설이후 처음으로 유엔의 기본정신에 입각하여 유엔기를 앞세우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집단적 행동을 펼친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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