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이 서린 "원통이길" 을 걷다
오늘(4월10일)은 매월 한 번씩 초등교육원로회 모임이 있는 날입니다. 장소는 간석오거리역 인근 The·k교직원회관입니다. 오늘 특강은 "폐암 선고 후 자연치유법으로 생존하고 있는 퇴임 선배교장의 투병기" 였습니다. '늦게 발견된 암은 수술보다는 자연요법으로 치료하는 것이 고통도 덜고 수명도 연장할 수 있다' 는 일석이조(一石二鳥) 이야기가 솔깃하게 들립니다.
만월산 약사사는 유·초 시절 소풍지였습니다. 부개동에서 경인국도를 따라 원퉁이고개길을 걷던 추억이 아련히 떠오름니다. 교직원공제회괸 웨딩뷔페(1층)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후, 인천종합노인복지회관에서 팔각정(만월정)을 경유하여 약사사 경내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고려 《최이》와 조선시대 《김안로》의 한(恨)이 서린 원퉁이길을 걸었습니다.
'원퉁이길' 에 대한 속설은 약사사 절 앞 안내판에 적혀 있는 내용입니다.
옛날에는, 삼남지방에서 걷은 세곡을 한양으로 운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배를 이용 인천 앞바다에서 한강을 거슬러 서울까지 가면 매우 편리하지만 강화도와 김포반도 시이에 흐르는 해협에 있는 손돌목이라는 곳에 소용돌이 급류에 세곡을 실은 배가 자주 침몰하여 나라 살림에 큰 주름이 잡히곤 하였다.
김안로는 아들 희(禧)가 중종의 부마가 됨으로서 왕실과 인척이 되어 권력을 손에 넣은 사람이지만 두뇌가 비상하다고 알려진 인물이다.그는 고려시대 최충헌의 아들 최이가 시도하다 중단한 김포 굴포천을 한강과 연결하려 하였다. 즉 한강 입구인 연사정에서부터 출발하여 부평의 굴포천을 깊이 파서 부평평야를 횡단하여 계양산맥의 원통현까지 나아가고, 또 한편 번지기 마을(현 가좌동)의 갯골 포구에서 시작하여 동암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사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김안로는 감독관에게 호통을 쳤다.
"나라의 경제가 여기 달렸는데, 왜 못 판단 말이냐 !"
감독관은 무릎을 꿇었다.
"산 전체가 단단한 돌이옵니다.'
김안로는 다시 호통을 쳤다.
"그래도 파라. 돌산을 부수란 말이다."
그러나 워낙 단단한 돌이라 곡갱이 끝이 번쩍번쩍 불꽃을 내며 튀었다.
햇불을 켜고 수백명이 한 달이 넘도록 돌산에 달라붙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결국 암벽을 관통하지 못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어"
김안로는 다른 방향을 찾으려 했다. 현재의 남동구 장수동에 있는 소래산 옆 수월현으로 방향을 돌려 인천 장수천을 깊이 파고자 했으나 이번에는 수월현의 암벽을 뚫지 못하였다.
"그래도 어딘가 길이 있을거야."
그는 세번째 시도에 나섰다. 이 번에는 굴포천에서 현재의 청천동 청천천과 연결시켜 수로를 깊이 파고 안하지 고개를 우회하면서 가정천으로부터 서해로 운하를 뚫으려 하였으나 철마산의 암벽을 뚫지 못하여 또다시 실패하였다.
김안로는 암벽 앞에 털석 주저앉았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왜 저희의 정성을 외면하십니까."
세 번의 노력이 실패하자 중종 임금은 단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
"참으로 원통한 일이오. 이제는 다른 수송의 방법을 발전시킬 밖에 없는 일이오."
결국 경인운하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런과정에서 인천에는 몇개의 지명이 생겼다. 결국 운하를 파지 못하여 원통하다고 하여 '원통이고개' 라 한 것이 원통현(圓通峴)으로 변하였고 , 물을 넘기려고 하였다고 해서 '무넘이 고개' 라 했는데 그것이 한자 뜻 그대로 수월현(水越峴)이란 지명이 되었다.
오늘 만월산과 약사사 그리고 원통이길을 걸으면서 디-카에 담은 사진이 꽤 많아 동영상으로 편집하여 부평시니어기자단 그리고 지인들에게 소개합니다. 오늘 하루도 즐거운 시간 되시기를 기원하면서...
-크리스탈/ 김청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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