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후기 지나고도 혹한의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햇살이 퍼지는 한낮에 등산용 지팡이를 들고 집을 나섰다. 동탄 여울공원을 가로질러 치동천 둘레 길로 들어섰다. 치동천은 무봉산 자락 중리저수지에서 발원하여 오산천까지 약 4km를 흐르는 하천이다. 오산천과 합류되는 치동천에는 동탄 제2신도시가 형성되면서 자그마치 9개의 교각이 생겼다.
지동천 1·2 교을 지나자 왼쪽으로 작은 하천이 보인다. 왼쪽 둘레 길로 500m 쯤 걸었을까, 농협 하나로 마트 건물이 보이고 도로위로 올라서니 다원중학교 옆으로 시원한 저수지가 보인다. ‘선납지(先納池)’이다.
수변 테크을 걸어 반대편으로 가니 붉은 색의 홍살문과 우암 송시열(1607~1689)선생을 기리는 우암정(尤庵亭)이라는 정자가 보였다. 우암 송시열은 ‘해동성인 송자’ 라 칭하던 조선 후기 주자학의 대가이자 노론의 거두가 아닌가! 선생의 흔적을 접하다니 나로서는 뜻밖이었다.
우암정이 있는 무봉산의 원래 이름은 만의산(대동여지도)였는데, 이곳에서 인재 육성을 위해 강학하시던 우암(尤庵)선생께서 ‘봉황이 춤을 추는 모습과 닮았다’ 하여 무봉산(舞鳳山)으로 개명하였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무봉산 일대는 송시열의 문집에도 언급이 되는 지역이다. 이곳에 초당을 지어 제자를 양성했던 곳으로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사색당파가 극심한 조선 후기, 스승(김장생·깁집)의 문하생으로 일찍이 장원급제하여 인종,효종, 숙종 임금을 모신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정치 인생사는 길고도 파란만장하였다. 효종의 전폭적인 신임과 지원으로 북벌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실추된 국가의 자존심을 고양하고자 했다. 그러나 소극적이었다는 다른 해석도 있다.
숙종 때 귀양지 제주에서 압송되던 길 정읍에서 83세에 수명(壽命)하시어 본래 무봉산 산기슭에 유택이 있었으나, 영조 때 괴산 청천에 이장(1757)되었다고 한다. 옛말에 소년 장원(壯元), 중년 상처(喪妻), 노년 빈곤(貧困) 3가지를 일러 '3대악재(惡材)' 하는 말이 있다. 결국 사사(賜死)로 삶을 끝냈어야 했지만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송시열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官爵)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글은 행복화성 시정지(2022.3월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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