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독서)

가정의 달, 다시 균형을 배우는 시간

길전 2026. 5. 6. 13:35

 

여든을 넘긴 나이에 접어들면서, 하루의 무게가 예전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젊은 시절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동작 하나, 발걸음 하나가 이제는 의식의 대상이 된다.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내고, 마음이 그 뒤를 따라가는 식이다.

 

그제 저녁이었다. 해가 기울 무렵, 집 안에만 머물기에는 마음이 답답해 아파트 인근에 자리한 나래울종합사회복지관실내 게이트볼장을 찾았다. 오랜만에 공을 굴리며 손끝 감각을 되살려 보고, 이어 뒤편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겨 천천히 걸었다. 운동이라기보다, 몸과 마음을 달래는 시간에 가까웠다.

 

운동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 구봉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길목에서 일이 생겼다. 순간 발걸음이 어긋나며 몸의 중심이 흔들렸고, 이내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양손에 쥐고 있던 등산용 스틱 덕분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순간은 꽤 길게 느껴졌다.

 

넘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내가 서 있는 자리의 불안정함을. 그리고 그 불안정함이 꼭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몸의 균형이 흔들리는 순간, 마음 또한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무심코 열어본 휴대전화 화면에서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인생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흔히 접하는 말이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또렷하게 다가왔다. 고대 철학자들이 남긴 말처럼, 결국 사람이 마주해야 할 가장 큰 대상은 외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 것이다.

 

문득 교직에 몸담고 있던 시절이 떠올랐다. 수없이 되뇌었던 문장 하나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며, 결국 운명이 바뀐다.” 그때는 학생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말이었다면, 지금은 나 자신에게 건네는 조용한 다짐처럼 느껴진다.

 

그날은 절기로 입하(立夏), 여름의 문턱에 들어서는 날이었다. 동시에 어린이날이기도 했다. 계절은 어김없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사람의 시간은 그 속에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문득 며칠 전 텃밭에 심어둔 고구마 싹이 떠올랐다. 비를 맞으며 급히 심어두고 돌아왔던 터라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서둘러 차를 몰아 동탄 인근 텃밭으로 향했다.

 

막상 도착해 보니, 고구마 잎들은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살아야 할 자리로 옮겨졌지만, 아직은 그곳에 익숙해지지 못한 모습이었다. 한동안 그 앞에 서서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흙을 모아 북을 돋우고 주변 잡초를 정리했다. 그리고 오산천에서 떠온 물을 한 바가지씩 부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사람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자리에 놓이든, 결국은 스스로 뿌리를 내려야 하고, 누군가의 작은 손길과 시간이 더해져야 비로소 자리를 잡는다.

 

한참을 그러고 서 있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 있었다. 아내가 챙겨준 간식도 미처 먹지 못한 채,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달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가족들이 모이기로 한 날이었다. 병점역 인근 식당에서 외손자들의 어린이날을 축하하고, 다가올 어버이날을 함께 기념하기로 한 자리였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우리 가족의 작은 의식 같은 시간이다.

 

손주들의 웃음소리, 자식들의 안부 인사, 그리고 함께 둘러앉아 나누는 식사 한 끼.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젊은 날의 시간들은 늘 앞만 보고 달려가기 바빴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미루는 일이 당연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삶은 그렇게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있다는 것을.

 

넘어졌던 그날의 기억도, 축 늘어진 고구마 싹도, 결국은 나에게 같은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서두르지 말 것, 그리고 중심을 잃지 말 것.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많은 것을 잃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가정의 달 5. 가족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내 삶의 균형을 다시 바로 세워주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임을 조용히 느껴본다.

 

** 크리스탈 힐링 일기/2026. 5. 6()**